구식 기술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 이유

경제 2008. 7. 3. 22:42 posted by 향기로운바람

저자 : Chris Pickering | 날짜:2001년 12월 06일  

오늘날 대표적인 구식 프로그래밍 언어, 코볼(COBOL: Common Business Oriented Language)이 아직까지 없어지지 않고 있는 이유를 아는가?

우리는 지금껏 시대에 뒤쳐진 코볼이 곧 없어져 버릴 것이라는 말을 무수히 많이 들어왔다. 새로운 프로그래밍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코볼은 금방이라도 다른 기술로 대체될 것처럼 보였다. 지난 30년 동안, 제 4세대 언어, 프로그램 생성기, CASE(Computer-Aided Software Engineering), 객체지향 프로그래밍 언어, 그 밖에 최신 개발 환경이 탄생하면서 코볼은 이들의 도전 앞에 결코 살아 남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코볼은 끝내 살아 남았다.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프로그래밍 언어 중 코볼로 작성된 애플리케이션이 가장 많을 정도로 코볼은 아직 건재하다.

그렇다고 코볼을 대체할 것으로 보였던 프로그래밍 언어들이 코볼과의 세력 다툼에 밀려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니다. 이들은 모두 프로그래밍 업계에서 코볼과 사이 좋게 ‘공생’하고 있다.

구세대 기술과 신세대 기술의 공존. 이는 기술 업계에서 반복해서 일어나고 있는 일종의 ‘패턴’이다.

어떤 기술이 제왕으로 군림했다가, 곧 이어 그 기술을 뒤이을 차세대 기술들이 등장한다. 차세대 기술들은 제왕의 자리에 있는 기술을 금방이라도 몰아낼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엔 모두 하나의 울타리에서 공존하고 만다는 것이 이 ‘패턴’의 주된 모습이다.

이런 예는 우리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메인프레임은 이미 오래 전부터 클라이언트-서버 시스템에 의해 멸종할 것이라고 수많은 전문가들에 의해 예견됐다. 그러나 메인프레임은 아직도 굳건히 살아있다. 이런 관계는 데스크 탑 PC와 네트웍 클라이언트 PC(일명, thin client) 사이에서도 재현되고 있으며, 전통적인 오프라인 비즈니스와 인터넷 비즈니스의 관계도 이와 같은 패턴을 보이고 있다.


구식 기술이 사라져야 하는 이유?

코볼이나 메인프레임 같은 ‘구식 기술’이 없어져야 한다는 주장은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린다. 구식 기술은 비합리적으로 복잡한데다 그들과 같은 기능을 갖는 같은 종류의 신기술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은 ‘구식 기술 퇴출론’의 중요한 논지다. 즉, 기업의 리소스 절약을 위해서 구세대 기술을 버리고 신세대 기술에만 투자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보자. 하드웨어 예산을 책정할 때 IT 담당자는 경영진에게 자주 이런 질문을 던지곤 한다. “왜 우리가 지금 메인프레임, AS/400, 유닉스 이 모든 시스템을 운영하기 위해 돈을 투자하고 있는 거죠?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애플리케이션은 모두 유닉스 시스템 하나로 돌아갈 수 있는데?”

이 말은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과 같은 맥락을 이룬다. “아마 앞으로 2년 동안 여기서 비주얼 베이직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러니 우린 지금 모든 프로그램을 자바로 바꿔야 합니다.”

하드웨어든 소프트웨어든, 이런 주장은 항상 기술의 복잡성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기저에 깔고 있다. 즉, 신기술을 도입하면 기술적인 복잡함을 최소화할 수 있고 중복되는 기술 투자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 이런 주장의 요점인 셈이다.

하지만 사업은 기술의 간결함과 동질성을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 사업에는 기술의 동질성 이외에 다른 목적이 있다.


옛 기술을 쉽게 보내지 못하는 이유

기술이 복잡해지고 서로 간에 이질성이 발생하는 것은 새로운 기술의 등장에 따라 나타나는 당연한 현상이다. 즉,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거나 기존 시스템에 새로운 기능을 더할 때마다, 서로 다른 기술들이 도입되고 기업 내 시스템은 더욱 복잡해 지는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보통 기존의 시스템을 ‘다시 작성하기 위해’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만일 지금 쓰고 있는 시스템이 제대로만 작동한다면 굳이 돈과 시간을 소비해 가며 기존 시스템을 버리거나 개선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비즈니스의 오랜 철학이다.

사업주들은 기술 간의 동질성이나 간결함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이들은 오직 기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기술이 갖는 ‘기능’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사업주가 기술 쪽에 투자할 때는 현재의 시스템이 지금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 뿐이다.

결과적으로 기업은 비싼 돈으로 들여놓은 구식 기술은 그대로 둔 채, 더 많은, 더 새로운 기능을 위해 신기술을 차례로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


비즈니스의 생리와 IT 종사자들의 책임

IT 종사자들은 이런 비즈니스의 생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먼저 기술의 동질성 따위는 잊어버리고, 현재 쓰고 있는 애플리케이션 시스템을 완전히 ‘누더기’가 될 때까지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도록. 기존 시스템이 도저히 더 이상 사용할 수가 없을 신세가 되야 기업은 그 시스템을 대체하기 위해 투자할 것이다. 따라서, IT 부서 담당자들은 현재 애플리케이션이 의존하고 있는 기술에, (코볼이든 메인프레임이든) 그 기술이 완전히 끝장날 때까지, 지원을 계속해야 한다는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신기술을 선택할 때는 먼저 그 기술이 기존 시스템에 어떤 기능을 부가할 수 있을지, 어떻게 원래의 성능을 향상시킬 수 있을지 알아야 한다. 또한 그 기술을 한번 도입하면 앞으로 ‘아주 오랫동안’ 사용할 것이라는 전제 하에 신중한 선택을 내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신기술을 도입할 경우, 중복되는 시스템 운영비 뿐만 아니라 그 중복되는 시스템을 관리할 인력까지 계산에 넣어야 한다.

기술에는 명분도 의리도 없다

비즈니스에 있어 중요한 것은 기술의 성격이나 대의명분, 합리성 따위가 아니다. 비즈니스에 있어 기술의 가장 중요한 점은 기능이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가장 최신의, 가장 훌륭한 기술이 탄생한다 하더라도 사업에 직접 도움이 되는 기능을 제공하지 못하면 아무데서도 도입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기술이 사업에 아무리 큰 도움이 되는 기능을 제공할지라도 기존 시스템이나 애플리케이션을 대체하지는 못한다. 신기술은 새로운 기능을 부가할 뿐, 기존의 기술을 갈아 치우기 위해 도입되는 것은 아니다.

구세대와 신세대 기술이 공존하는 것은 성공적인 비즈니스를 위한 당연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구식 기술이 우리의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건재한 이유엔 이처럼 ‘깊고 냉정한 뜻’이 담겨 있다.